삶의 파노라마
오차숙
“핸들을 어느 방향으로 돌리면 좋겠소?”
그 사람은 와이셔츠 깃으로 땀방울을 훔쳐내며 중얼거렸다.
“알아서 질주 해봐요, 어디론가 생명력이 넘치는 세상으로 나를 안내해 봐요…. 휴일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렵게 만들어낸 소중한 시간들, 오늘 만큼은 당신에게 영혼까지도 처절하게 상납하고 싶으니까….”
초조한 마음으로 그 사람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핸들의 방향을 주시했다. 여름날의 따가운 햇살, 숨 막히는 권태로움과 허허로움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해 보려고 조용한 시선으로 붉게 탄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여전히 땀방울을 훔쳐냈다.
머리끝 열기까지도 식혀주는 에어컨의 몸부림에도 행선지를 결정하지 못해 ‘서성이는 외출’을 연출해냈다.
갈등 끝에 정릉 터널로 들어섰다.
미로의 세계로 향한 한 쌍의 남녀, 휴일의 정오는 중년 남녀의 마음을 숯덩이로 만들만큼 짜증을 부렸고, 터널 속에 즐비한 자동차도 주차장을 방불할 만큼 헉헉댔다.
“행선지가 어딘데요? 차라리, 저쪽 길로 갔었으면….”
U턴도 할 수 없는 숨 막히는 터널 속, 순간 눈을 감은 채 그 사람과 함께한 29년간의 시간들을 더듬어 보았다. 터널 속에서 삶의 한계성에 진저리를 치며 되돌아갈 수 없는 삶에 고개를 숙였다.
“이 자체가 삶이라면 며칠 전 결혼한 딸아이는 어떡하지, 지금쯤 신혼지 해변에서 한 쌍의 야생마처럼 뒹굴고 있겠지만, 29년 후 지금의 내 모습처럼 삶의 터널 속에서 아이러니한 충돌에 부딪치면 어떡하지.”
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묘한 상상력을 심어줄 뿐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갔다.
뙤약볕에 시달리는 내부순환도로, 눈앞에 펼쳐지는 제멋대로의 교통상황, 차라리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침묵했다. 환상과 꿈, 기대감도 포기한 채 그 사람이 안내하는 미지의 세계로 묵묵히 따라갔다.
“지금쯤 동료들의 골프공이 창공을 휘가를 텐데….”
의식을 가다듬고 있는데 그 사람의 혼잣말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의 외출을 통해 서로를 훔쳐보니 우리가 달려온 길, 앞으로 달려갈 길은 너무나 멀고 색상이 달랐다. 여건이 미미한 상태에서도 서로가 자의식은 강렬해 그 사람은 골프에 몰두해 있었고, 나는 소위 문학에 미쳐 있었다.
그럼 앞으로 남은 길은 페이브먼트일까. 오솔길일까.
불안하게 걸어가는 우리들의 미로(迷路) 여러 가지 생각에 시달렸지만 그 사람이 안내하는 여행지 - 나는 조용히 그 사람이 클릭한 삶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걸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제, 내리시오”
“여기가 어딘데요?”
“상암 월드컵경기장, 여기를 한 바퀴 둘러보고 경기장 관리소장으로 근무하는 동기생 사무실로 가 봅시다.”
“그래요? 혼자 다녀오세요. 나는 로비에서 기다릴 테니까.”
그 사람은 퉁퉁거리며 2층 사무실로 뛰어가더니 낯선 남자와 함께 내려와 인사하라며 눈짓을 했다. 순간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가며, 인사의 형식을 갖춘 후 밖으로 쫓겨나듯 뛰쳐나왔다.
“차라리 이런 형태의 나들이라면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아”라고 두리번거리며 버스를 찾았으나, 버스가 눈에 띄지 않았다.
의식도 없이 다른 길을 걸어와 버린 우리 두 사람. 오랜만의 ‘외출’도 의미 있게 보내지 못한 채 미묘한 수렁으로 빠져들던 그 처절함….
그 사람은 황당한 모습으로 다시 나를 차에 태운 채 어디론가 달렸다.
둘이는 오랜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향이 칼칼한 목적지, 어디로 달리는지 모르지만, 숨을 죽인 채 묻고 싶지 않았다.
오후 3시까지 뱃속도 텅 빈 상태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드높은 하늘과 싱그러운 소나무, 서울을 벗어나 송추 방향으로 달려가는 자동차는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남녀 간의 끈이 싱싱해지려면 탄력성 있는 고무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프랑스 소설가 ‘프레보’의 말을 상기해 보며, 조심스럽게 나는 무의식까지 조율했다.
그 사람은 주유소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커피 한잔 마시겠소? 저기 자판기가 보이네.
“그래요.”
사실 자판기 커피를 서비스 받으면서도 ‘동전을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조심스럽게 삶의 편린들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인데 환상을 깨버리면 어떡하지’ 하며 공포에 떨었으나, 자판기 쪽으로 달려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엔 미묘한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사람은 예전과는 달리 많이 긴장하는 듯했다.
위태로운 여름날의 외출은 그 사람의 매너 있는 커피 한잔으로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했다.(휴우~)
“늦었지만 점심을 합시다.”
“그래요. 메뉴를 정하세요.”
그 사람은 ‘은행나무집’ 이라는 음식점으로 나를 안내하며 돼지갈비가 어떠냐고 물었다. 저녁 장사를 준비하려는 적막한 음식점, 돼지갈비는 나에게 특별한 메뉴였지만 지난 수요일, 금요일, 연 3일 동안 계속 그 메뉴를 접한 상태였다. 지방에서 친척이 방문해서, 그 사람의 퇴근이 늦어지자 아이들과 저녁 한 끼를 쉽게 해결하기 위해, 내가 연루된 모임에서의 점심식사까지도 그 메뉴였다. 때문에 성의 있는 메뉴라 할지라도 돼지갈비를 택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그 사람을 난처하게 하기 싫어 죽은 듯이 그 메뉴를 택했다.
순간 슬픔의 실체가 나를 휘젓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야, 무언가 문제가 많아.”
그 사람과 나의 삶의 방식, 생활과 취미가 극과 극처럼 어긋난 데서 일어나는 현상임을 실감했다. 공유하는 시간이 많지 않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일을 하게끔 배려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탓이었다.
결과는 일주일 내내 서로가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지향하는 삶은 어떤 색상인지, 먼 나라 사람들처럼 무덤덤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삶의 리모델링이 시급한 상태였다.
이 형태의 생활이 지속되다가는 한 지붕 밑에 기거하는 ‘동거인’ 같은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망설임 끝에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들자며 골프 아카데미에 가입해 레슨을 받았다.
그러나 비싼 골프화와 복장에도 불구하고 3개월 정도도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시간이면 많은 책을 읽을 텐데, 의미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하며 갈등하다 보니 연습에 깊이 몰입될 수가 없었다.
방황 끝에 소용돌이 속에서 발견한 소박한 실천 하나 -그 사람과 나는 ‘하루하루의 안녕’을 비는 마음으로 아침 출근직전에 커피를 마시고 있다. 저녁 10시 30분이 되면 ‘하루를 확인’하는 입장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산책길에 나선다.
목적지가 투명하게 설정된 곳으로 핸들을 돌리며 ‘의미 있는 나들이’를 하기 위해, 터널 속에서 숨이 막힐 때 ‘U턴하지 못하는 삶’에 회의를 느끼지 않기 위해, 일주일에 ‘네 번씩 돼지갈비’를 먹지 않기 위해, 서로의 존재감을 의식하며 밤하늘을 바라본다.
서울 밤거리에 깔려 있는 갖가지의 불빛과 치열하게 교류하며 조촐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29년 전, 그 사람 등에 업혀 남춘천 둑길을 가던 그 느낌은 찾을 수 없더라도….
- 작품집 [감성에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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